1. 황폐한 문, 몰락한 인간
라쇼몬은 인간의 본성과 도덕적 선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헤이안 시대의 교토, 비가 내리는 황폐한 라쇼몬이다. 과거에는 웅장한 건축물이었으나, 이제는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해 버려진 시체들이 쌓이는 장소로 변해버렸다. 도시는 몰락했고, 질서와 도덕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곳에서 한 사내가 비를 피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해고된 하급 무사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절망에 빠져 있다. 배고픔이 그를 엄습하지만, 도둑질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망설인다. 그는 과거에는 양심을 지키며 살아왔지만, 이 극한의 상황에서는 기존의 도덕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도둑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것은 더욱 끔찍한 일이다.
비는 멈추지 않고, 어둠이 점점 짙어진다. 사람들은 이미 이 문을 버렸고, 사내는 마치 유령처럼 그곳에 홀로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2. 노파와 사내, 생존을 위한 잔혹한 선택
라쇼몬 안으로 들어간 사내는 한 노파가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가발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사내는 경악하며 그녀를 나무라지만, 노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시체들은 생전에 남을 속이며 살아온 사람들이었으므로, 죽은 후에도 이용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노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부끄럽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며, 결국 살아남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사내는 이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진다. 자신 역시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노파의 행동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논리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진다.
그는 처음에는 노파를 비난하지만, 결국 도덕적 갈등 속에서 극적인 결정을 내린다. 그는 노파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도망친다. 처음에는 도둑질을 경멸하던 그가, 결국 같은 방식으로 생존을 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한 선택이 다른 어떤 선택보다도 비열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3. 도덕과 욕망, 인간 본성의 민낯
라쇼몬은 인간이 처한 환경에 따라 얼마나 쉽게 도덕적 기준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내는 처음에는 노파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 노파 역시 자신의 행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죽은 자들을 이용하는 것이며,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라쇼몬이라는 공간 자체도 이러한 인간 본성의 변화를 상징한다. 과거에는 위엄 있는 문이었으나, 이제는 죽음과 절망이 가득한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도덕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살아남기 위한 선택만이 중요해진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가.
노파가 자신이 한 행동을 정당화했듯이, 사내도 결국 도둑질을 하며 살아남을 것이다. 라쇼몬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존재이며, 도덕적 기준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4. 라쇼몬, 인간의 끝없는 선택 앞에서
라쇼몬은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때 도덕과 생존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도덕적 판단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악한 행동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존재다.
사내는 노파의 논리를 부정할 수 없었고, 결국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인간이 처한 상황이 변하면, 그 사람의 가치관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를 통해 인간 본성이 얼마나 취약하며, 동시에 얼마나 유연한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도덕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환경에 따라 변하는 존재인가.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도덕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가. 라쇼몬의 어두운 공간 속에서 벌어진 이 짧은 사건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동시에, 누구나 자신에게 던져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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